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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 문헌 자료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5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2021년 11월 14연중 제33주일)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FOR THE FIFTH WORLD DAY OF THE POOR

14 November 2021, Thirty-third Sunday in Ordinary Time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르 14,7)

“The poor you will always have with you” (Mk 14:7)

 


 1.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르 14,7). 예수님께서는 파스카가 있기 며칠 전에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 식탁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복음사가가 말한 것처럼어떤 여자가 값비싼 향유가 가득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그 향유를 부었습니다이는 무척 놀라운 일이었고이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나왔습니다.

1. “The poor you will always have with you” (Mk 14:7). Jesus spoke these words at a meal in Bethany, in the home of a certain Simon, known as the leper, a few days before Passover. As the Evangelist recounts, a woman came in with an alabaster flask full of precious ointment and poured it over Jesus’ head. This caused great amazement and gave rise to two different interpretations.

 

첫 번째 해석은제자들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느낀 불쾌함이었습니다그들은 노동자의 일 년 치 월급과 맞먹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 값을 따지면서그 향유를 팔아 번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요한 복음서에서는 유다가 이 역할을 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요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그가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5-6). 이러한 심한 비난의 말이 배신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가난한 이를 존중하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고 또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이와 관련해서 오리게네스는 다음과 같이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유다는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어떤 이가 교회의 돈주머니를 맡아 유다처럼 가난한 이를 대변하면서도 그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을 가로채 간다면유다와 똑같은 사람입니다”(마태오 복음 주해[Commentarii in Matthaeum], 11, 9).

The first was indignation on the part of some of those present, including the disciples, who, considering the value of the ointment – about 300 denarii, equivalent to the annual salary of a labourer – thought it should have been sold and the proceeds given to the poor. In Saint John’s Gospel, Judas takes this position: “Why was this ointment not sold for three hundred denarii and given to the poor?” Saint John goes on to note that Judas “said this not because he cared about the poor, but because he was a thief, and as he had the money box, he used to take what was put in it” (12:5-6). It was no accident that this harsh criticism came from the mouth of the traitor: it shows those who do not respect the poor betray Jesus’ teaching and cannot be his disciples. Origen has strong words in this regard: “Judas appeared to be concerned about the poor... If in our own day some hold the purse of the Church and, like Judas, speak out for the poor, but then take out what they put in, let them share in the lot of Judas” (Commentary on the Gospel of Matthew, 11, 9).

 

두 번째 해석은 예수님의 해석으로이는 여자가 보인 행동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가만두어라왜 괴롭히느냐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마르 14,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시고그 여자의 행동에서 무덤에 묻히기 전 당신의 생명을 잃은 몸에 하는 도유임을 예견하신 것입니다이는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그 어떤 상상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으뜸이라는 사실을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셨던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모든 가난한 이를 대변하시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여자의 행동을 받아들이신 것은 가난한 이들외로운 이들소외된 이들차별받은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그 여자만이 주님의 생각을 여성의 섬세함으로 이해했습니다이 무명의 여자는 어쩌면 시대를 거치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폭력에 시달리는 모든 여성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 이 무명의 여자는 그리스도의 삶에서 절정의 모든 순간에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순간돌아가신 순간무덤에 묻히신 순간 그리고 부활하신 순간에 특별하게 있었던 여자들 가운데 첫 번째였습니다여자들은 큰 책임을 맡는 자리에서 종종 차별받고 제외되지만복음은 여자들이 계시의 역사에서 주역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화의 위대한 사명에 이 여자를 연관 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르 14,9).

The second interpretation was that of Jesus, and it makes us appreciate the profound meaning of the woman’s act. He says, “Let her alone. Why do you trouble her? She has done a beautiful thing to me” (Mk 14:6). Jesus knows that his death is approaching, and he sees in her act an anticipation of the anointing of his lifeless body prior to its placement in the tomb. This was beyond anything the others present could imagine. Jesus was reminding them that he is the first of the poor, the poorest of the poor, because he represents all of them. It was also for the sake of the poor, the lonely, the marginalized and the victims of discrimination, that the Son of God accepted the woman’s gesture. With a woman’s sensitivity, she alone understood what the Lord was thinking. That nameless woman, meant perhaps to represent all those women who down the centuries would be silenced and suffer violence, thus became the first of those women who were significantly present at the supreme moments of Christ’s life: his crucifixion, death, burial and resurrection. Women, so often discriminated against and excluded from positions of responsibility, are seen in the Gospels to play a leading role in the history of revelation. Jesus’ then goes on to associate that woman with the great mission of evangelization: “Amen, I say to you, wherever the Gospel is proclaimed to the whole world, what she has done will be told in memory of her” (Mk 14:9).

 

2. 예수님과 이 여자 사이에 형성된 이 강한 공감유다와 다른 이들이 느낀 불쾌함과는 반대되는 그 여자의 도유에 대한 예수님만의 해석은 예수님과 가난한 이들과 복음 선포 사이의 떼어놓을 수 없는 연결 고리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2. This powerful “empathy” established between Jesus and the woman, and his own interpretation of her anointing as opposed to the scandalized view of Judas and others, can lead to a fruitful reflection on the inseparable link between Jesus, the poor and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얼굴은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고 그들 곁에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입니다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서 가난이 운명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는 당신 현존의 구체적인 표징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우리는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가난한 이들의 삶에서그들의 고통과 어려움 중에그들이 내몰려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봅니다제가 거듭거듭 말씀드리는 것처럼 가난한 이들이 진정한 복음 전파자입니다그들은 복음화되고 주님의 기쁨을 나누며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도록 부름받은 첫 번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3 참조).

The face of God revealed by Jesus is that of a Father concerned for and close to the poor. In everything, Jesus teaches that poverty is not the result of fate, but a concrete sign pointing to his presence among us. We do not find him when and where we want, but see him in the lives of the poor, in their sufferings and needs, in the often inhuman conditions in which they are forced to live. As I never tire of repeating, the poor are true evangelizers, for they were the first to be evangelized and called to share in the Lord's joy and his kingdom (cf. Mt 5:3).

 

가난한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복음화시킵니다그들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참 얼굴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그들은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자신의 고통 속에서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는 것입니다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도록 하여야 합니다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그들에게 귀 기울이며그들을 이해하고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우리의 임무는 증진과 지원의 계획이나 활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성령께서 촉구하시는 것은 과도한 행동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다른 이를 어떤 의미에서 나 자신과 하나라고 여기며 다른 이를 향하여 쏟는 관심입니다이 사랑의 관심에서 그 사람에 대한 참다운 관심이 시작되고 내가 실질적으로 그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98-199).

The poor, always and everywhere, evangelize us, because they enable us to discover in new ways the true face of the Father. “They have much to teach us. Besides participating in the sensus fidei, they know the suffering Christ through their own sufferings. It is necessary that we all let ourselves be evangelized by them. The new evangelization is an invitation to recognize the salvific power of their lives and to place them at the centre of the Church’s journey. We are called to discover Christ in them, to lend them our voice in their causes, but also to be their friends, to listen to them, to understand them and to welcome the mysterious wisdom that God wants to communicate to us through them. Our commitment does not consist exclusively of activities or programmes of promotion and assistance; what the Holy Spirit mobilizes is not an unruly activism, but above all an attentiveness that considers the other in a certain sense as one with ourselves. This loving attentiveness is the beginning of a true concern for their person which inspires me effectively to seek their good” (Evangelii Gaudium, 198-199).

 

3.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곁에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함께 나누십니다이 사실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는 가르침입니다이것이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의미입니다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무관심해져서는 안 되고오히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상호 나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가난한 이들은 우리 공동체 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우리는 그들의 어려움과 소외를 덜어 주고 잃어버린 그들의 존엄성을 되찾아 주며 그들에게 꼭 필요한 사회 통합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한편우리가 알고 있듯이 자선 행위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전제로 하는 반면에 상호 나눔은 형제애를 만들어냅니다자선은 이따금 하는 것이지만상호 나눔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자선은자선을 행하는 사람을 자기만족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고자선을 받는 사람을 모욕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상호 나눔은 연대를 강화하고 정의 실현을 위한 필수 기반을 마련합니다다시 말해예수님을 직접 보고 직접 만져보고자 할 때믿는 이들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압니다가난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성사입니다가난한 이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나타내고 그분을 가리킵니다.

3. Jesus not only sides with the poor; he also shares their lot. This is a powerful lesson for his disciples in every age. This is the meaning of his observation that “the poor you will always have with you”. The poor will always be with us, yet that should not make us indifferent, but summon us instead to a mutual sharing of life that does not allow proxies. The poor are not people “outside” our communities, but brothers and sisters whose sufferings we should share, in an effort to alleviate their difficulties and marginalization, restore their lost dignity and ensure their necessary social inclusion. On the other hand, as we know, acts of charity presuppose a giver and a receiver, whereas mutual sharing generates fraternity. Almsgiving is occasional; mutual sharing, on the other hand, is enduring. The former risks gratifying those who perform it and can prove demeaning for those who receive it; the latter strengthens solidarity and lays the necessary foundations for achieving justice. In short, believers, when they want to see Jesus in person and touch him with their hands, know where to turn. The poor are a sacrament of Christ; they represent his person and point to him.

 

가난한 이들과의 상호 나눔을 자기 삶의 계획으로 삼았던 모범이 되는 성인들이 많이 있습니다이러한 성인들 가운데 저는 사제 다미안 드 베스테르(Damien de Veuster) 성인을 생각합니다다미안 성인은 나환자들의 거룩한 사도입니다성인은 나병 환자들만이 갈 수 있는 격리 지역이었던 몰로카이 섬으로 가서 죽는 날까지 그들과 함께 살라는 부르심에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했습니다성인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이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성인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며 의사도 되고 간호사도 되어당시 죽음의 식민지라고 불리던 이 섬에 사랑의 빛을 비추었습니다성인은 결국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이는 자기 삶을 바쳐 돌보던 형제자매들과 운명을 온전히 나누었다는 표징이 되었습니다성인의 증언은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에 시달리고 있는 이 시대에 정말 시의적절합니다하느님 은총은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티나지 않게 자신을 바치며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 나누는 모든 이의 마음 안에서 분명 작용합니다.

Many are the examples of saints who made mutual sharing with the poor their life project. I think, among others, of Father Damien de Veuster, the saintly apostle to the lepers. With great generosity, he answered the call to go to the island of Molokai, which had become a ghetto accessible only to lepers, to live and die with them. He rolled up his sleeves and did everything he could to improve the lives of those who were poor, ill and outcast. He became both doctor and nurse, heedless of the risks involved, and brought the light of love to that “colony of death”, as the island was then called. He himself contracted leprosy, which became the sign of his total sharing in the lot of the brothers and sisters for whom he had given his life. His testimony is most timely in our own days, marked by the coronavirus pandemic. The grace of God is surely at work in the hearts of all those who, without fanfare, spend themselves for the poorest, sharing with them in concrete ways.

 

4.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는 주님의 초대에 온 마음을 다하여 응답해야 합니다먼저 이러한 회개는 온갖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고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에 맞갖게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종종 가난한 이들은 별개의 사람들곧 특별한 자선 봉사가 필요한 부류로 여겨집니다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바꾸고상호 나눔과 참여라는 도전 과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상의 보물을 모으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지상의 보물은 안심해도 될 것이라는 환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한낱 부질없고 덧없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참된 행복과 기쁨을 이루는 데에 망설이도록 하는 모든 구속에서 기꺼이 자유로워지겠다는 마음을 요구합니다이는 영원한 것곧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것(마태 6,19-20 참조)을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4. We need, then, wholeheartedly to follow the Lord's invitation to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Mk 1:15). This conversion consists primarily in opening our hearts to recognizing the many different forms of poverty and manifesting the Kingdom of God through a lifestyle consistent with the faith we profess. Often the poor are viewed as persons apart, as a “category” in need of specific charitable services. Yet following Jesus entails changing this way of thinking and embracing the challenge of mutual sharing and involvement. Christian discipleship entails deciding not to accumulate earthly treasures, which give the illusion of a security that is actually fragile and fleeting. It requires a willingness to be set free from all that holds us back from achieving true happiness and bliss, in order to recognize what is lasting, what cannot be destroyed by anyone or anything (cf. Mt 6:19-20).

 

여기에서도 역시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대세를 거스릅니다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온전한 확신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만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아버지나 어머니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재물세속적 권력허영심을 버리고 가난한 이가 되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우리는 결코 우리 삶을 사랑으로 내어 줄 수 없을 것입니다우리는 충분히 좋은 의도를 지녔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에는 쓸모없는 단절된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결연히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합니다그리스도의 은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증언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 존재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도록 해 줄 수 있습니다.

Here too, Jesus’ teaching goes against the grain, for it promises what can only be seen and experienced with complete certainty by the eyes of faith. “Everyone who has left houses or brothers or sisters or father or mother or children or lands for my name’s sake will receive a hundredfold, and inherit eternal life” (Mt 19:29). Unless we choose to become poor in passing riches, worldly power and vanity, we will never be able to give our lives in love; we will live a fragmented existence, full of good intentions but ineffective for transforming the world. We need, therefore, to open ourselves decisively to the grace of Christ, which can make us witnesses of his boundless charity and restore credibility to our presence in the world.

 

5.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다그칩니다가난한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표현하라고또한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초래하고 있는 온갖 극단적인 형태의 도덕적 사회적 불의를 인식하라고 우리를 다그치는 것입니다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빈곤에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제 체제에도 버거운 짐이 된다는 생각이 확산되는 듯합니다윤리 원칙들을 도외시하거나 그 가운데 몇 가지 원칙만을 골라 선택하는 시장은 이미 불안정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비인간적인 조건들을 조성합니다오늘날 우리는 빈곤과 배척이라는 새로운 덫들이 놓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인도주의적 인식과 사회적 책임이 결여된 비양심적 경제와 금융의 주체들이 이러한 새로운 덫을 쳐 놓은 것입니다.

5. Christ’s Gospel summons us to display special concern for the poor and to recognize the varied and excessive forms of moral and social disorder that are generating ever new forms of poverty. There seems to be a growing notion that the poor are not only responsible for their condition, but that they represent an intolerable burden for an economic system focused on the interests of a few privileged groups. A market that ignores ethical principles, or picks and chooses from among them, creates inhumane conditions for people already in precarious situations. We are now seeing the creation of new traps of poverty and exclusion, set by unscrupulous economic and financial actors lacking in a humanitarian sense and in social responsibility.

 

지난해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수를 늘린 또 다른 재앙인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을 겪었습니다이 사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고통과 죽음을 동반하는 경우는 아니라고 해도 그들에게 빈곤의 그림자를 드리웁니다가난한 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안타깝게도 앞으로 얼마간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어떤 나라들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에 심각한 타격을 입어 여전히 고통받고 있기에국민 가운데 가장 힘없는 이들은 기초 생필품 부족에 시달립니다무료 급식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은 이처럼 악화된 상황을 드러내는 가시적인 표지입니다일부의 이윤을 추구하는 일 없이 전 세계 차원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데에 가장 적합한 수단들을 찾아야 합니다실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젊은이를 포함하여 실직자를 위한 구체적 대응이 특히 시급합니다하느님께 감사하게도많은 이들이 보여 준 사회적 연대와 관용은 인간 증진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과 함께 이러한 국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Last year we experienced yet another scourge that multiplied the numbers of the poor: the pandemic, which continues to affect millions of people and, even when it does not bring suffering and death, is nonetheless a portent of poverty. The poor have increased disproportionately and, tragically, they will continue to do so in the coming months. Some countries are suffering extremely severe consequences from the pandemic, so that the most vulnerable of their people lack basic necessities. The long lines in front of soup kitchens are a tangible sign of this deterioration. There is a clear need to find the most suitable means of combating the virus at the global level without promoting partisan interests. It is especially urgent to offer concrete responses to those who are unemployed, whose numbers include many fathers, mothers, and young people. Social solidarity and the generosity which many, thanks be to God, have shown are, together with far-sighted projects of human promotion, making a most important contribution at this juncture.

 

6. 그렇더라도 불분명한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우리는 무관심만을 마주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성가신 존재로 여겨지는 수백만 명의 가난한 이들에게 어떻게 구체적인 응답을 줄 수 있습니까어떤 정의의 길을 따라야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고짓밟히곤 하는 인간 존엄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개인주의적 생활양식은 빈곤을 만들어 내는 공범이고종종 가난한 이들에게 그들 처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그러나 가난은 운명이 아니라 이기심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그렇기에 역량의 보완과 역할의 다양성이 상호 참여를 위한 공동의 자원이 될 수 있도록모든 이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는 발전 과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유한 이들이 지닌 많은 형태의 가난은 가난한 이들이 지닌 부유함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이 서로 만나 알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서로 나누고자 할 때그 누구도 아무것도 내어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하지 않습니다가난한 이들은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그들도 베푸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너그럽게 응답하는 법을 그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우리 눈앞에 수많은 나눔의 모범이 있지 않습니까가난한 이들이 우리에게 연대와 나눔을 가르쳐 주는 때가 많습니다실제로 가난한 이들은 무엇인가 부족한생필품을 비롯하여 흔히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들이지만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들은 아닙니다그들은 그 어떤 것도 그리고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엄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6. Nonetheless, one question, which is by no means obvious, remains. How can we give a tangible response to the millions of the poor who frequently encounter only indifference, if not resentment? What path of justice must be followed so that social inequalities can be overcome and human dignity, so often trampled upon, can be restored? Individualistic lifestyles are complicit in generating poverty, and often saddle the poor with responsibility for their condition. Yet poverty is not the result of fate; it is the result of selfishness. It is critical, therefore, to generate development processes in which the abilities of all are valued, so that complementarity of skills and diversity of roles can lead to a common resource of mutual participation. There are many forms of poverty among the “rich” that might be relieved by the wealth of the “poor”, if only they could meet and get to know each other! None are so poor that they cannot give something of themselves in mutual exchange. The poor cannot be only those who receive; they must be put in a position to give, because they know well how to respond with generosity. How many examples of sharing are before our eyes! The poor often teach us about solidarity and sharing. True, they may be people who lack some things, often many things, including the bare necessities, yet they do not lack everything, for they retain the dignity of God's children that nothing and no one can take away from them.

 

7. 이러한 까닭에 가난에 대한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이러한 접근은 정부와 국제기관이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으며 다가올 수십 년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새로운 형태의 빈곤에 대응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사회 모델로 이어가야 하는 도전 과제입니다가난한 이들이 마치 제 탓으로 가난한 처지에 놓이기라도 한 것처럼 소외된다면민주주의의 개념 자체가 위기에 빠지고 모든 사회 정책이 파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가난한 이들의 문제 앞에서 우리가 무능해지곤 한다는 것을 겸허히 고백하여야 합니다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말합니다우리는 그저 통계만 내고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으로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오히려 가난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자유의 신장을 향한 창의적 계획을 세우게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돈을 가지면 자유가 생기고 커진다는 생각은 우리가 마땅히 거부해야 하는 환상입니다가난한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봉사는 우리를 행동하도록 이끌어 줍니다또한 이러한 봉사는너무 빈번하게 익명의 소리 없는 존재가 되곤 하지만 우리의 도움을 청하시는 구세주의 얼굴이 아로새겨져 있는 이러한 인류의 일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증진할 가장 적절한 방법들을 찾게 해 줍니다.

7. For this reason, a different approach to poverty is required. This is a challenge that governments and world institutions need to take up with a farsighted social model capable of countering the new forms of poverty that are now sweeping the world and will decisively affect coming decades. If the poor are marginalized, as if they were to blame for their condition, then the very concept of democracy is jeopardized and every social policy will prove bankrupt. With great humility, we should confess that we are often incompetent when it comes to the poor. We talk about them in the abstract; we stop at statistics and we think we can move people’s hearts by filming a documentary. Poverty, on the contrary, should motivate us to creative planning, aimed at increasing the freedom needed to live a life of fulfilment according to the abilities of each person. It is an illusion, which we should reject, to think that freedom comes about and grows through the possession of money. Serving the poor effectively moves us into action and makes it possible to find the most suitable ways of raising and promoting this part of humanity that all too often is anonymous and voiceless, but which has imprinted on it the face of the Saviour who asks for our help.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르 14,7). 이 말씀은 선행의 모든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라는 초대입니다그 배경에서 성경의 오래된 명령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오히려 너희 손을 활짝 펴서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 그에게 줄 때에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그러면 이 일 때문에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대는 모든 것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그 땅에서 가난한 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신명 15,7-8.10-11). 같은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도 자기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에 속한 가난한 이들을 돕되 다음과 같이 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이는 자선을 베풂으로써 양심의 짐을 덜어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만들어 온 무관심과 불의의 문화에 맞서는 문제입니다.

8. “The poor you will always have with you” (Mk 14:7). This is a summons never to lose sight of every opportunity to do good. Behind it, we can glimpse the ancient biblical command: “If one of your brothers and sisters… is in need, you shall not harden your heart nor close your hand to them in their need. Instead, you shall open your hand to them and freely lend them enough to meet their need… When you give to them, give freely and not with ill will; for the Lord, your God, will bless you for this in all your works and undertakings. For the needy will never be lacking in the land” (Deut 15:7-8, 10-11). In a similar vein, the Apostle Paul urged the Christians of his communities to come to the aid of the poor of the first community of Jerusalem and to do so “without sadness or compulsion, for God loves a cheerful giver” (2 Cor 9:7). It is not a question of easing our conscience by giving alms, but of opposing the culture of indifference and injustice we have created with regard to the poor.

 

이러한 상황에서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을 떠올려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너그러운 이들은 가난한 이들의 행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지 말고 다만 그들의 가난한 처지를 개선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가난한 이들의 유일한 탄원은 그들의 가난과 그들이 놓인 궁핍한 처지에 대한 것입니다가난한 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십시오그들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악인이라도필요한 양식이 부족하다면 그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 자비로운 이들은 궁핍한 이들에게 항구와 같습니다난파 사고를 당한 모든 이를 환대하고 위험에서 빠져나오게 해 주는 항구인 것입니다항구는 그들이 악인이든 선인이든그들이 그 누구든 상관없이 쉬게 해 주는 피난처입니다그러므로 여러분도 가난이라는 난파에 시달리는 사람을 보거든 그를 판단하지도그의 행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지도 말고 불행에서 그를 구해 주십시오”(라자로에 관한 강해[De Lazaro homiliae], II, 5).

In this context, we do well to recall the words of Saint John Chrysostom: “Those who are generous should not ask for an account of the poor’s conduct, but only improve their condition of poverty and satisfy their need. The poor have only one plea: their poverty and the condition of need in which they find themselves. Do not ask anything else of them; but even if they are the most wicked persons in the world, if they lack the necessary nourishment, let us free them from hunger. ... The merciful are like a harbour for those in need: the harbour welcomes and frees from danger all those who are shipwrecked; whether they are evildoers, good persons, or whatever they may be, the harbour shelters them within its inlet. You, too, therefore, when you see on land a man or a woman who has suffered the shipwreck of poverty, do not judge, do not ask for an account of their conduct, but deliver them from their misfortune” (Discourses on the Poor Man Lazarus, II, 5).

 

9.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대한 인식을 증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가난한 이들의 삶의 처지가 바뀌듯 그들의 필요도 늘 변화합니다실제로 오늘날 세계에서 경제 번영을 더 누리는 지역의 사람들은 빈곤에 대처하려는 의지가 예전보다 덜합니다우리가 익숙해진 상대적 풍요의 상황이 희생과 손실을 받아들이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사람들은 손쉽게 얻은 결실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무엇이라도 할 태세를 갖춥니다그 결과 그들은 공포와 불안경우에 따라 폭력까지 불러오는 온갖 방식으로 분노하고 느닷없이 신경질 부리며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이것은 결코 우리의 미래를 건설하는 방법이 아닙니다그러한 태도들 자체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가난의 여러 형태입니다현대 세계에서 복음 선포자가 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라는 시대의 징표들을 읽어내는 열린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그 즉시 도움을 주는 일이인류가 오늘날 겪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빈곤에 대한 대응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선의 새로운 징표들을 구현하기 위한 장기적 안목을 갖추는 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9. It is crucial that we grow in our awareness of the needs of the poor, which are always changing, as are their living conditions. Today, in fact, in the more economically developed areas of the world, people are less willing than in the past to confront poverty. The state of relative affluence to which we have become accustomed makes it more difficult to accept sacrifices and deprivation. People are ready to do anything rather than to be deprived of the fruits of easy gain. As a result, they fall into forms of resentment, spasmodic nervousness and demands that lead to fear, anxiety and, in some cases, violence. This is no way to build our future; those attitudes are themselves forms of poverty which we cannot disregard. We need to be open to reading the signs of the times that ask us to find new ways of being evangelizers in the contemporary world. Immediate assistance in responding to the needs of the poor must not prevent us from showing foresight in implementing new signs of Christian love and charity as a response to the new forms of poverty experienced by humanity today.

 

이제 다섯 번째 해를 맞이하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거행이 우리 지역 교회 안에서 점점 더 뿌리내리고가난한 이들이 어디에 있든 그들을 직접 만나는 복음화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우리는 가난한 이들이 문을 두드리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습니다가난한 이들의 집으로병원과 요양원으로거리로때로는 그들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사각지대로그리고 쉼터와 보호소로 그들을 찾아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마음속으로 무엇을 갈망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프리모 마촐라리(Primo Mazzolari) 신부의 간절한 애원에 우리 마음을 함께 모읍시다. “가난한 이들이 있는지그들이 누구이며 얼마나 많이 있는지 저에게 묻지 말아 주시기를 당신께 청하나이다그렇게 물으시면 저희가 양심과 마음을 울리는 호소를 회피하려는 술수를 부리거나 변명을 하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난한 이들의 수를 헤아려 본 적이 없습니다그들은 숫자로 셀 수 없기 때문입니다가난한 이들의 수를 헤아릴 것이 아니라 그들을 품어 안아야 합니다”(아데소[Adesso], 7-15, 1949.4.). 가난한 이들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우리도 가난합니다우리가 이렇게 진실되이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음적이겠습니까우리도 가난하다고 말할 때에만 우리는 참으로 가난한 이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우리 삶에 받아들이며 그들이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It is my hope that the celebration of the World Day of the Poor, now in its fifth year, will grow in our local Churches and inspire a movement of evangelization that meets the poor personally wherever they may be. We cannot wait for the poor to knock on our door; we need urgently to reach them in their homes, in hospitals and nursing homes, on the streets and in the dark corners where they sometimes hide, in shelters and reception centres.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how they feel, what they are experiencing and what their hearts desire. Let us make our own the heartfelt plea of Father Primo Mazzolari: “I beg you not to ask me if there are poor people, who they are and how many of them there are, because I fear that those questions represent a distraction or a pretext for avoiding a clear appeal to our consciences and our hearts... I have never counted the poor, because they cannot be counted: the poor are to be embraced, not counted” (“Adesso” n. 7 – 15 April 1949). The poor are present in our midst. How evangelical it would be if we could say with all truth: we too are poor, because only in this way will we truly be able to recognize them, to make them part of our lives and an instrument of our salvation.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1년 6월 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Rome, Saint John Lateran,

13 June 2021,

Memorial of Saint Anthony of Padua

FRANCISCUS

 

 

<원문: 그의 거룩한 교황 프란치스코의 메시지, 가난한 사람의 다섯 번째 세계 날, "당신은 항상 당신과 함께있을 것이다 가난한"(Mk 14,7), 2021.6.13., >

 

❋ 한글원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누리집

>> https://cbck.or.kr/Notice/20210809?gb=K1200

 

❋ 영어원문 교황청 웹사이트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poveri/documents/20210613-messaggio-v-giornatamondiale-poveri-2021.html


❋ 정평위 담화문 전문 바로가기

>> catholicjp.or.kr/2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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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수 2021.08.18 02:36
    [ 담화문 요약 ]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5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2021년 11월 14일, 연중 제33주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르 14,7)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르 14,7). 파스카가 있기 며칠 전에 어떤 여자가 값비싼 향유가 가득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그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마르 14,6).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가난한 이를 대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이 여자 사이에 형성된 이 강한 ‘공감’과, 유다와 다른 이들이 느낀 불쾌함과는 반대되는 그 여자의 도유에 대한 예수님만의 해석은 예수님과 가난한 이들과 복음 선포 사이의 떼어놓을 수 없는 연결 고리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얼굴은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고 그들 곁에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진정한 복음 전파자입니다. 그들은 복음화되고 주님의 기쁨을 나누며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도록 부름받은 첫 번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3 참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운명을 함께 나누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 공동체 ‘밖’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성사입니다.

    종종 가난한 이들은 특별한 자선 봉사가 필요한 ‘부류’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상호 나눔과 참여라는 도전 과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상의 보물을 모으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재물, 세속적 권력, 허영심을 버리고 가난한 이가 되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우리 삶을 사랑으로 내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개인주의적 생활양식은 종종 가난한 이들에게 그들 처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러나 가난은 운명이 아니라 이기심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역량의 보완과 역할의 다양성이 상호 참여를 위한 공동의 자원이 될 수 있도록, 모든 이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는 발전 과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유한 이들’이 지닌 많은 형태의 가난은 ‘가난한 이들’이 지닌 부유함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도 베푸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가난에 대한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저 통계만 내고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으로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가난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자유의 신장을 향한 창의적 계획을 세우게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르 14,7). 이 말씀은 선행의 모든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초대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을 떠올려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비로운 이들은 궁핍한 이들에게 항구와 같습니다. … 항구는 그들이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들이 그 누구든 상관없이 쉬게 해 주는 피난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가난이라는 난파에 시달리는 사람을 보거든 그를 판단하지도, 그의 행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지도 말고 불행에서 그를 구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손쉽게 얻은 결실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무엇이라도 할 태세를 갖춥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공포와 불안, 경우에 따라 폭력까지 불러오는 온갖 방식으로 분노하고 느닷없이 신경질 부리며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한 태도들 자체도 가난의 여러 형태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도 가난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진실되이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음적이겠습니까. 우리도 가난하다고 말할 때에만 우리는 참으로 가난한 이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우리 삶에 받아들이며 그들이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1년 6월 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한국어 번역문 전문: https://cbck.or.kr/Notice/20210809
    요약문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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