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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 문헌 자료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20191117, 연중 제33주일)




33rd Sunday in Ordinary Time / 17 November 2019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

The hope of the poor shall not perish for ever



1.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시편 9,19). 이 시편 말씀은 지금도 놀라울 정도로 시의적절합니다. 신앙이 특히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불의와 고통과 불안한 삶 앞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아 줄 수 있다는 심오한 진리를, 이 말씀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1. “The hope of the poor will not perish for ever” (Ps 9:19). These words of the Psalm remain timely. They express a profound truth that faith impresses above all on the hearts of the poor, restoring lost hope in the face of injustice, sufferings and the uncertainties of life.


시편 저자는 가난한 이의 처지와 가난한 이를 억압하는 이의 교만을 이야기합니다(시편 10,1-10[9,22-31] 참조). 그는 불의를 극복하고 정의를 되살리고자 하느님의 심판을 간구합니다(10,14-15[9,35-39] 참조). 이 시편 말씀 안에 담긴 몇 가지 물음들이 수 세기를 거쳐 우리 시대에까지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찌 이러한 불평등을 용납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가난한 이가 굴욕을 당할 때에 도움은커녕 어찌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있으십니까? 특히 가난한 이의 고통 앞에서, 억압자들이 그 악행으로 단죄받기는커녕 더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을 어찌 내버려 두십니까?

The Psalmist describes the condition of the poor and the arrogance of those who oppress them (cf. 10, 1-10). He invokes God’s judgment to restore justice and overcome evil (cf. 10, 14-15). In his words, we hear an echo of age-old questions. How can God tolerate this disparity? How can he let the poor be humiliated without coming to their aid? Why does he allow oppressors to prosper instead of condemning their conduct, especially in the light of the sufferings of the poor?


이 시편이 저술된 때는 큰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흔히 그러하듯 이러한 경제 발전은 심각한 사회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수많은 빈곤층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빈곤한 이들의 상황은 소수 특권층이 누리는 부에 비하여 더욱더 비극적이었습니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직접 겪었기에 참으로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Psalm was composed at a time of great economic development that, as often happens, also led to serious social imbalances. The inequitable distribution of wealth created a significant number of poor people, whose condition appeared all the more dramatic in comparison with the wealth attained by a privileged few. The Psalmist, observing the situation, paints a picture as realistic as it is true.


그 당시는, 교만하고 불경한 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괴롭히며 그들의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도 갈취하고 노예로 삼기까지 하던 시대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경제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부를 축적해 왔습니다. 최소한의 생활필수품도 없고 때로는 멸시와 착취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을 우리가 날마다 도시의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고 있는 이때에, 이러한 부의 축적은 더욱더 부조리하게 보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묵시 3,17). 수 세기가 흘러도 역사가 우리에게 아무런 교훈도 남겨 주지 않은 것마냥, 빈부의 상황은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시편 말씀은 그저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해당됩니다. 우리의 현재는 하느님 심판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It was a time when arrogant and ungodly people hounded the poor, seeking to take possession even of what little they had, and to reduce them to bondage. The situation is not much different today. The economic crisis has not prevented large groups of people from accumulating fortunes that often appear all the more incongruous when, in the streets of our cities, we daily encounter great numbers of the poor who lack the bare necessities of life and are at times harassed and exploited. The words of Book of Revelation come to mind: “You say, I am rich, I have prospered, and I need nothing. You do not realize that you are wretched, pitiable, poor, blind and naked” (Rev 3:17). The centuries pass, but the condition of rich and poor remains constant, as if history has taught us nothing. The words of the Psalm, then, are not about the past, but about our present, as it stands before God’s judgement.



2. 오늘날에도 우리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 젊은이와 어린이를 예속하는 수많은 형태의 새로운 노예화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2. Today too, we must acknowledge many new forms of bondage that enslave millions of men, women, young people and children.


우리는 날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른 곳에서 생계 수단을 찾으려고 고향 땅을 떠날 수밖에 없는 가정들, 무자비한 착취 탓에 부모를 여의었거나 강제로 부모와 생이별하게 된 고아들, 직업적 성취를 이루려 하지만 근시안적 경제 정책 탓에 일자리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 매매춘에서 불법 마약 거래에 이르기까지 깊은 모멸감을 안겨 주는 온갖 폭력의 피해자들을 날마다 마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은폐된 수많은 사리사욕의 희생양으로 전락해 버리고, 정치적으로 빈번히 이용당하며, 연대와 평등마저도 부인되는 수백만 이민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도시의 거리를 떠도는 수많은 노숙자들소외된 이들도 어찌 잊겠습니까?

Daily we encounter families forced to leave their homeland to seek a living elsewhere; orphans who have lost their parents or were violently torn from them by brutal means of exploitation; young people seeking professional fulfilment but prevented from employment by shortsighted economic policies; victims of different kinds of violence, ranging from prostitution to the narcotics trade, and profoundly demeaned. How can we overlook, too, the millions of immigrants who fall victim to any number of concealed interests, often exploited for political advantage, and are refused solidarity and equality? And all the homeless and ostracized persons who roam the streets of our cities?


남들이 쓰다 남아서 버린 것들 가운데에서 요깃거리나 옷가지를 찾으려고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가난한 이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볼 수 있습니까! 가난한 이들 자신이 인간이 버린 쓰레기더미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치욕에 공모한 이들은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흔히 사회의 기생충으로 낙인찍혀, 그들의 가난조차 용서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낙인은 늘 따라다닙니다.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또는 그냥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해도,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 위축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How many times do we see poor people rummaging through garbage bins to retrieve what others have discarded as superfluous, in the hope of finding something to live on or to wear! They themselves become part of a human garbage bin; they are treated as refuse, without the slightest sense of guilt on the part of those who are complicit in this scandal. Frequently judged parasites on society, the poor are not even forgiven their poverty. Judgment is always around the corner. They are not allowed to be timid or discouraged; they are seen as a threat or simply useless, simply because they are poor.


설상가상으로 이 극심한 가난의 굴레는 벗어날 방도가 없으니, 가난한 이들은 막막할 따름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남겨진 최후의 보루인 길거리에서마저 이들을 쫓아낼 목적으로, 사람들은 적대적 건축’(hostile architecture)을 고안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일자리든 집이든 사랑의 손길을 찾으리라는 희망으로 도시의 끝에서 끝으로 배회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베풂도 한줄기 빛이 됩니다. 그러나 정의가 넘칠 것 같은 곳에서조차 그들은 폭력과 학대를 당하기 일쑤입니다. 제때에 수확하려고 온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중노동에 시달려도 그들이 받는 임금은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안전하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실업 수당이나 각종 보조금, 심지어 질병에 대한 대비책도 없습니다.

To make matters worse, they can see no end to the tunnel of extreme poverty. We have come to the point of devising a hostile architecture aimed at ridding the streets of their presence, the last places left to them. They roam from one end of the city to the other in the hope of getting a job, a home, a sign of affectionThe least offer becomes a ray of light; yet even where justice might be expected to prevail, they meet with violence and abuse. Forced to work endless hours under a burning sun to gather seasonal fruits, they receive ridiculously low pay. They labour in unsafe and inhuman conditions that prevent them from feeling on a par with others. They lack unemployment compensation, benefits, or even provision for sickness.


시편 저자는 가난한 이들을 약탈하는 부자들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신랄하게 묘사합니다. “그는 가련한 이를 잡아채려 노리다가 그물로 끌어당겨 잡아챕니다”(시편 10,9[9,30]). 마치 사냥당하듯, 가난한 이들은 덫에 사로잡혀 종살이로 끌려가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마음을 닫아 버리고 다른 이들 눈에 띄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간단히 말해서,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주 멸시받고 참기 힘든 성가신 존재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모든 면에서 투명 인간처럼 되어 버렸고, 사회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거나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집에서도 이방인이 되어 가고, 이웃들 사이에서도 소외되어 갑니다.

The Psalmist describes with brutal realism the attitude of the rich who rob the poor: “They lie in wait that they may seize the poorand drag them off in their net” (cf. Ps 10:9). As in a hunt, the poor are trapped, captured and enslaved. As a result, many of them become disheartened, hardened and anxious only to drop out of sight. In a word, we see before us a multitude of poor people often maligned and barely tolerated. They become for all effects invisible and their voice is no longer heard or heeded in society. Men and women who are increasingly strangers amid our houses and outcasts in our neighborhoods.



3. 이 시편의 배경은, 가난한 이들이 견뎌야 하는 불의와 고통과 좌절 때문에,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편 구절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아름다운 정의가 나옵니다. 가난한 이들은 주님을 신뢰하는이들입니다(시편 9,11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그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이들은 신뢰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신뢰의 이유도 제시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기때문입니다(시편 9,11 참조). 성경에서 이러한 은 애정과 사랑의 인격적 관계를 가리킵니다.

3. The setting of the Psalm is tinged with sadness at the injustice, the suffering and the disappointment endured by the poor. At the same time, it offers a touching definition of the poor: they are those who “put their trust in the Lord” (cf. v. 10), in the certainty that they will never be forsaken. In the Scriptures, the poor are those who trust! The Psalmist also gives the reason for this trust: they “know” the Lord (cf. ibid.). In the language of the Bible, such “knowledge” involves a personal relationship of affection and love.


전혀 예기치 못한 참으로 인상적인 이러한 표현은 오로지 하느님의 위대하심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와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권능은 모든 인간의 기대를 능가하고,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해 주시는 것’(시편 9,13 참조)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주님에 대한 이러한 신뢰, 주님께서는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리라는 이러한 확신이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결코 저버리지 못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기억해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은 가난한 이들이 고통받는 현 상황을 뛰어넘어 해방의 길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해방의 길은 마음을 가장 굳세게 해 주고 바꾸어 주는 길입니다.

Impressive and completely unexpected as this description is, it simply expresses the grandeur of God, as shown in the way he relates to the poor. His creative power surpasses all human expectations and is shown in his being “mindful” of each individual (cf. v. 13). It is precisely this confidence in the Lord, this certainty of not being forsaken, that inculcates hope. The poor know that God cannot abandon them; hence, they live always in the presence of the God who is mindful of them. God’s help extends beyond their present state of suffering in order to point out a path of liberation that profoundly strengthens and transforms the heart.



4.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그들을 도와주시는분입니다. 또한 그들을 지켜 주시고’, ‘변호해 주시며’, ‘구해 주시고’, ‘구원하시는분입니다. 마침내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결코 그들의 간구 앞에서 침묵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베푸시며 아니 잊으시는 분입니다(시편 40[39],18; 70[69],6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며, 결코 그들을 도와주지 않으시는 일이 없습니다(시편 10,14[9,35] 참조).

4. Scripture constantly speaks of God acting on behalf of the poor. He is the one who “hears” their cry” and “comes to their aid”; he “protects” and “defends” them; he “rescues” and “saves” themIndeed, the poor will never find God indifferent or silent in the face of their plea. God is the one who renders justice and does not forget (cf. Ps 40:18; 70:6); he is their refuge and he never fails to come to their assistance (cf. Ps 10:14).


우리는 수많은 장벽을 세우고 문을 닫아걸어 놓고서, 문밖에 남겨진 사람들의 희생으로 얻은 재산을 가지고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기는 망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대로, “주님의 날”(아모 5,18; 이사 2-5; 요엘 1-3장 참조)에는 나라들 사이를 가르던 장벽들이 무너지고 다수의 연대가 소수의 교만을 대신할 것입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소외는 오래 이어질 수 없습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높아져 온 지구를 뒤덮을 것입니다. 프리모 마촐라리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불의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화약통입니다. 이 화약통에 불이 붙으면 세상은 폭발할 것입니다.”

We can build any number of walls and close our doors in the vain effort to feel secure in our wealth, at the expense of those left outside. It will not be that way for ever. The “day of the Lord”, as described by the prophets (cf. Am 5:18; Is 2-5; Jl 1-3), will destroy the barriers created between nations and replace the arrogance of the few with the solidarity of many. The marginalization painfully experienced by millions of persons cannot go on for long. Their cry is growing louder and embraces the entire earth. In the words of Father Primo Mazzolari: “the poor are a constant protest against our injustices; the poor are a powder keg. If it is set on fire, the world will explode”.



5.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여 외치는 성경의 절박한 호소를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어디를 보더라도, 하느님 말씀은 가난한 이들, 타인에게 종속되어 생활필수품조차 부족한 이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억압받는 이들, 비천한 이들, 땅에 쓰러져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무수히 많은 가난한 이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동일시를 부정한다면 복음을 거짓되게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계시를 흐려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신 하느님께서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마르지 않는 선과 은총의 아버지이십니다. 특히 실의에 빠져 미래의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5. We can never elude the urgent appeal that Scripture makes on behalf of the poor. Wherever we look, the word of God points to the poor, those who lack the necessities of life because they depend on others. They are the oppressed, the lowly and the downcast. Yet, faced with countless throngs of the poor, Jesus was not afraid to identify with each of them: “Whatever you did to one of the least of these my brethren, you did to me” (Mt 25:40). If we refuse to make this identification, we falsify the Gospel and water down God’s revelation. The God that Jesus came to reveal is a Father who is generous, merciful, unfailing in his goodness and grace. He gives hope especially to those who are disillusioned and lacking in hope for the future.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가장 먼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로 시작되는 참행복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찌 주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역설적 메시지는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임을 뜻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마주칩니까! 시간이 지나고 문명이 발전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수 세기가 흘렀는데도 참행복은 더욱더 역설인 듯 여겨집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더 가난해져 왔고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가난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을 중심으로 당신 나라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지만 그분께서는 당신 제자들인 우리에게 이를 이끌어 나갈 임무를,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책임과 더불어 맡기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에는 희망을 되살리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러한 책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포와 증언이 지니는 신뢰성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How can we fail to note that the Beatitudes with which Jesus began his preaching of the kingdom of God open with the words: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Lk 6:20)? The meaning of this paradoxical message is that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the poor because they are in a position to receive it. How many poor people do we encounter each day! It seems that the passage of time and the advances of civilization increase their numbers rather than diminishing them. Centuries go by and the Beatitude appears even more paradoxical: the poor are always poorer, and today they are poorer than ever. Yet Jesus who inaugurated his kingdom by placing the poor at the centre, wanted to tell us precisely this: he inaugurated the kingdom, but he has entrusted to us, his disciples, the task of carrying it forward with responsibility for giving hope to the poor. Especially at times like our own, there is a need to revive hope and to restore confidence. This responsibility is not something that the Christian community may underestimate. The credibility of our proclamation and the witness of Christians depends on it.



6.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교회는 자신이 한 백성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여러 나라들로 퍼져 나가, 함께하는 구원 여정에서 그 누구도 자신이 이방인이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끼지 않게 보장하라고 부름받은 한 백성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현실은 우리에게 그들 안에서 고통을 겪고 계신 주님의 몸을 멀리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몸을 어루만지고 진정한 복음화인 봉사에 직접 투신하라고 부름받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은 복음 선포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는 그리스도 신앙의 현실 감각과 역사적 타당성을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생기를 주는 사랑은, 그분 제자들이 사회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고 폐쇄적 개인주의에 갇혀 있거나 영적 친교를 나누는 소모임 안에 숨어 있을 수 없게 합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83항 참조).

6. In closeness to the poor, the Church comes to realize that she is one people, spread throughout many nations and called to ensure that no one feels a stranger or outcast, for she includes everyone in a shared journey of salvation. The situation of the poor obliges us not to keep our distance from the body of the Lord, who suffers in them. Instead, we are called to touch his flesh and to be personally committed in offering a service that is an authentic form of evangelization. Commitment to the promotion of the poor, including their social promotion, is not foreign to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On the contrary, it manifests the realism of Christian faith and its historical validity. The love that gives life to faith in Jesus makes it impossible for his disciples to remain enclosed in a stifling individualism or withdrawn into small circles of spiritual intimacy, with no influence on social life (cf. Apostolic Exhortation Evangelii Gaudium, 183).


슬프게도 우리는 최근 가난한 이들의 위대한 사도인 장 바니에의 선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헌신적 노력은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를 드러내고 그들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하느님 은총으로, 장 바니에는 중증 장애를 지닌 형제자매에게, 흔히 사회에서 배척받곤 하는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옆집의 성인이었습니다. 장 바니에의 열정에 이끌려 그의 주변으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과 젊은이들은, 수많은 약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그들의 웃음을 되찾아 주고자 날마다 노력하면서 소외와 고독에 맞설 참된 구원의 방주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장 바니에가 보여 준 이러한 증언에 힘입어 무수한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고, 세상은 가장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확고한 희망이 생겨났으며, 오늘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시적이고 분명한 구체적인 사랑의 징표들이 드러났습니다.

Recently, we were saddened by the death of a great apostle of the poor, Jean Vanier, whose dedication opened up new ways of showing solidarity with the marginalized and working for their advancement. God gave Jean Vanier the gift of devoting his entire life to our brothers and sisters with grave disabilities, people whom society often tends to exclude. He was one of those saints “next door”; thanks to his enthusiasm, he gathered around himself great numbers of young people, men and women, who worked daily to give love and restore a smile to many vulnerable persons, offering them a true “ark” of salvation from marginalization and solitude. His witness changed the life of countless persons and helped the world to look differently at those less fortunate than ourselves. The cry of the poor was heard and produced an unwavering hope, creating visible and tangible signs of a concrete love that even today we can touch with our hands.



7.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선택, 사회가 저버린 이들을 위한 선택”(복음의 기쁨, 195)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부름받은 우선적 선택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교회의 신뢰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힘없는 형제자매들에게 참다운 희망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과 기꺼이 나눔으로써 스스로 힘을 얻고 복음 선포에 힘을 실어 주기 때문입니다.

7. “The option for those who are least, those whom society discards” (Evangelii Gaudium, 195) is a priority that Christ’s followers are called to pursue, so as not to impugn the Church’s credibility but to give real hope to many of our vulnerable brothers and sisters. Christian charity finds concrete expression in them, for by their compassion and their willingness to share the love of Christ with those in need, they are themselves strengthened and confirm the preaching of the Gospel.


올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일상생활 안에서, 지원 사업에 그저 동참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물론 지원 사업은 꼭 필요한 일이며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더 나아가 모든 이가 온갖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 각자에게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도록 격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사랑의 관심에서가난한 이들과 그 진정한 복지 증진을 위한 참다운 관심이 시작됩니다”(복음의 기쁨, 199).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번영을 늘리는 데에만 급급한 소비주의 문화와 버리는 문화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희망을 증언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본질을 재발견하고 하느님 나라를 구체적이고 힘 있게 선포하려면 사고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The involvement of Christians in this World Day of the Poor and especially in the events of everyday life, goes beyond initiatives of assistance. Praiseworthy and necessary as the latter may be, they should have the goal of encouraging in everyone a greater concern for individuals in any kind of distress. “Loving attentiveness is the beginning of true concern” (Evangelii Gaudium, 199) for the poor and the promotion of their genuine welfare. It is not easy to be witnesses of Christian hope in the context of a consumerist culture, a culture of waste concerned only for the spread of a shallow and ephemeral wellbeing. A change of mentality is needed, in order to rediscover what is essential and to give substance and verve to the preaching of the kingdom of God.


또한 희망은, 한순간의 열정이 아닌 오랜 시간 지속적인 노력으로 가난한 이들과 동행하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을 통해서도 전달됩니다.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희망은, 우리가 그들에게 짧은 시간을 할애하고 만족해하는 모습을 볼 때가 아니라, 우리의 희생이 보답을 바라지 않는 거저 주는 사랑의 행위임을 느낄 때 생겨납니다.

Hope is also communicated by the sense of fulfilment born of accompanying the poor not for a brief moment of enthusiasm, but through a constant commitment over time. The poor acquire genuine hope, not from seeing us gratified by giving them a few moments of our time, but from recognizing in our sacrifice an act of gratuitous love that seeks no reward.



8. 많은 자원 봉사자 여러분이 계속 헌신적으로 봉사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자원 봉사자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의 중요성을 먼저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만나는 가난한 모든 사람 안에서 그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을 찾으라고 권고합니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물질적 필요에 멈추지 말고, 그들 내면의 선함을 발견하고 그들의 배경과 표현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참된 형제적 대화를 시작하라고 여러분께 권고합니다. 이념적 정치적 입장이 초래한 분열을 뒤로하고 그 대신에 본질에 시선을 고정합시다. , 가난한 이들은 넘쳐 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눈길과 활짝 내민 손을 호소하고 있다는 데에 시선을 고정합시다. “가난한 이가 겪는 최악의 차별은 영적 관심의 부족”(복음의 기쁨, 200)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8. I ask the many volunteers, who merit recognition for being the first to see the importance of such concern for the poor, to persevere in their dedicated service. Dear brothers and sisters, I encourage you to seek, in every poor person whom you encounter, his or her true needs, not to stop at their most obvious material needs, but to discover their inner goodness, paying heed to their background and their way of expressing themselves, and in this way to initiate a true fraternal dialogue. Let us set aside the divisions born of ideological and political positions, and instead fix our gaze on what is essential, on what does not call for a flood of words, but a gaze of love and an outstretched hand. Never forget that “the worst discrimination which the poor suffer is the lack of spiritual care” (Evangelii Gaudium, 200).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옆집의 성인들을 통하여, 곧 자신의 소박한 삶으로 그리스도 사랑의 힘을 명확히 보여 주는 사람들을 통하여 가시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방식과 수많은 수단을 활용하시어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으십니다. 분명 가난한 이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단지 우리가 제공하는 따뜻한 식사나 빵 한 쪽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들을 일으켜 세워 주는 우리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또한 다시금 따스한 애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마음과,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동행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Before all else, the poor need God and his love, made visible by “the saints next door”, people who by the simplicity of their lives express clearly the power of Christian love. God uses any number of ways and countless means to reach people’s hearts. Certainly, the poor come to us also because we give them food, but what they really need is more than our offer of a warm meal or a sandwich. The poor need our hands, to be lifted up; our hearts, to feel anew the warmth of affection; our presence, to overcome loneliness. In a word, they need love.



9. 때때로, 아주 사소한 것이 희망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잠시 멈추어 미소 짓고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한 번만이라도, 통계 숫자는 생각하지 말아 봅시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업적과 계획을 과시하고자 인용하는 통계 수치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은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외로운 사람들이며,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가난한 이들은 모두 친절한 말 한 마디를 기대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만나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9. At times, very little is needed to restore hope. It is enough to stop for a moment, smile and listen. For once, let us set statistics aside: the poor are not statistics to cite when boasting of our works and projects. The poor are persons to be encountered; they are lonely, young and old, to be invited to our homes to share a meal; men women and children who look for a friendly word. The poor save us because they enable us to encounter the face of Jesus Christ.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가난과 궁핍이 구원의 힘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은 비논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6-29). 인간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에는 이러한 구원의 힘을 이해할 수 없지만, 신앙의 눈으로 우리는 이 힘의 작용을 이해하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심장에는 그러한 구원의 힘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힘은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며 모두가 회개를 향한 참된 순례에 동참하여 가난한 이를 알아보고 그들을 사랑하게 해 줍니다.

In the eyes of the world, it seems illogical to think that poverty and need can possess saving power. Yet that is the teaching of the Apostle, who tells us: “Not many of you were wise by human standards, not many were powerful, not many were of noble birth. But God chose what is foolish in the world to shame the wise; God chose what is weak in the world to shame the strong; God chose what is low and despised in the world, things that are not, to reduce to nothing things that are, so that no one might boast in the presence of God” (1 Cor 1:26-29). Looking at things from a human standpoint, we fail to see this saving power, but with the eyes of faith, we see it at work and experience it personally. In the heart of the pilgrim People of God there beats that saving power which excludes no one and involves everyone in a real journey pilgrimage of conversion, to recognize the poor and to love them.



10.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고 당신께 간구하는 이들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가련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아니 잊으십니다”(시편 9,12).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희망은 참혹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이 사랑이 어떠한 고통이나 배척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하느님께서 주신 그들의 존엄을 그들에게서 빼앗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몸소 그들의 존엄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확신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힘없는 당신 자녀들의 처지에 무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재앙과 재난을 보시고 손수 처리하시며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시편 10,14[9,35] 참조). 가난한 이들의 희망은, 주님께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참된 정의를 찾아 주시며 그들의 마음을 굳세게 하시어 그들이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 안에서 굳건해집니다(시편 10,17[9,38] 참조).

10. The Lord does not abandon those who seek him and call upon his name: “He does not forget the cry of the poor” (Ps 9:12), for his ears are attentive to their voice. The hope of the poor defies deadly situations, for the poor know that they are especially loved by God, and this is stronger than any suffering or exclusion. Poverty does not deprive them of their God-given dignity; they live in the certainty that it will be fully restored to them by God himself, who is not indifferent to the lot of his lowliest sons and daughters. On the contrary, he sees their struggles and sorrows, he takes them by the hand, and he gives them strength and courage (cf. Ps 10:14). The hope of the poor is confirmed in the certainty that their voice is heard by the Lord, that in him they will find true justice, that their hearts will be strengthened and continue to love (cf. Ps 10:17).


주 예수님의 제자들이 참된 복음 선포자가 되고자 한다면, 구체적인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하기를 염원하는 모든 이에게 당부합니다. 이번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하여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하여, 어느 누구도 친교와 연대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지 않게 도움을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미래를 선포하는 예언자의 다음 말씀을 언제나 소중히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If the disciples of the Lord Jesus wish to be genuine evangelizers, they must sow tangible seeds of hope. I ask all Christian communities, and all those who feel impelled to offer hope and consolation to the poor, to help ensure that this World Day of the Poor will encourage more and more people to cooperate effectively so that no one will feel deprived of closeness and solidarity. May you always treasure the words of the prophet who proclaims a different future: “For you who revere my name, the sun of righteousness shall rise, with healing in its wings” (Mal 3:20 [4:2]).



바티칸에서 2019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From the Vatican, 13 June 2019

Memorial of Saint Anthony of Padua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Third World Day of the Poor, The hope of the poor shall not perish for ever, 2019.6.13., 영어와 이탈리아어 참조>


한글 원문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영어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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